조선의 제21대 국왕. 숙종과 인현왕후를 모시는 몸종이자 궁녀의 옷을 빨던 무수리 출신이었던 숙빈 최씨 사이에서 차남 숙빈 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대부분 생각하겠지만 전에 태어났었던 영수라는 아기가 있었으나 요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조 순서는 둘째이다.으로 태어났다.
군호는 연잉군 ( 延仍君 ) . 영조는 왕실 최초로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로서 왕위에 오른 왕이다. 즉 혈연적으로는 숙종의 아들로서 직계비속이지만 공식적으로는 경종의 동생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즉 방계로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에 약점이 있었다. 대부호 집안의 중인 출신에 한때 정비 인현왕후를 제치고 정비가 됐었던 희빈 장씨의 아들인 형 경종과 달리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다. 형 경종의 즉위 때 신임옥사 ( 훗날 영조를 지지해준 노론 4대신이 집권 여당인 소론 측의 공격으로 이때 사약을 먹고 죽었다. ) 가 일어나면서 거의 죽을뻔 했었다.
1724년. 31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즉위했지만 영조의 치세는 장장 52년에 달했으며 조선국왕 평균 재위 기간의 두 배하고도 14년, 조선왕조 518년 역사 중 영조 혼자서 무려 10분의 1을 차지한다. 아버지 숙종도 조선 역사상 두 번째로 재위가 길었기 때문에 ( 46년 ) 부자가 합치면 조선 왕조 오백년 중 약 100여년, 대략 5분의 1를 차지한다. 숙종 ( 46년 ) , 고종 ( 44년 ) , 선조 ( 41년 ) , 중종 ( 38년 ) 이 뒤를 잇는다. 이는 조선 왕사에 있어 최장 집권에 해당한다. 또한 영조는 한국 역대 군왕 중 고구려 장수왕 ( 78년 재위 ) , 발해 문왕 ( 57년 재위 ) , 신라 진평왕 ( 53년 재위 ) 에 이어 네 번째로 오래 집권한 군주이며, 고구려 장수왕 이래 두 번째로 오래 산 군주에 해당한다. 단순 기록상으로는 가야의 수로왕과 고구려의 태조왕이 더 오래 살았고 더 오래 집권했으나, 이는 후세에 조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다만, 발해 문왕의 경우 정황상 영조와 비슷하거나 더 긴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삼국 시대 국왕들은 출생연도가 알려진 경우가 거의 없기에 실제로 영조보다 더 오래 산 국왕도 분명히 존재할 여지가 있다.
오랜 집권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지만, 한편으로는 적지않은 과오도 범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처형시킨 임오화변이 꼽힌다. 임오화변은 한국사 뿐만이 아니라 세계사적 측면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형태의 왕실 사건에 해당한다. 영조는 임오화변 당시 69세로 이미 조선의 역대 군왕 중 최고령에 해당했으며 사도세자 처형 이후로도 14년의 기간 동안 조선을 더 다스렸다.
탕평책을 위시한 영조의 전반적인 정치는 크게 성공적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영조의 가정사는 언제나 불행했다.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와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 ( 정빈 이씨 ) 에게서 얻은 장남 효장세자^^ ( 진종 ) ^^는 10살도 채우지 못하고 요절했다. 뒤를 이어 후궁 영빈 이씨 사이에서 늦둥이 아들인 이선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훗날에 사도세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영조는 가까스로 얻게 된 아들 이선을 출생 직후 곧바로 세자로 책봉하였고, 아들이 젖먹이 유아이던 시절부터 과도한 학습을 강요하였다. 영조의 어긋난 애정으로 정서적인 학대를 당한 이선은 결국 정신병 증세를 보였고 각종 기행을 일삼게 된다. 세자 책봉을 물릴 수 없었던 영조는 그러한 이선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극약처방을 내렸으며, 머지않아 이를 크게 후회하여 사망한 아들에게 생각할 사 ( 思 ) 와 슬퍼할 도 ( 悼 ) 의 사도 ( 思悼 ) 라는 시호를 내린다.
아들의 죽음 이후로도 손자인 이산^^ ( 당시 왕세손 ) ^^에 대한 영조의 애정은 각별했고, 그를 통해 300년 종사와 보위를 이을려는 생각도 확고했다. 국왕으로서 불가결했던 정통성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영조는 정조의 세손 책봉식 때 자신이 왕세제 책봉식에서 입었던 옷을 입힐 만큼 지극정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