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1337~1453년, 116년 동안 벌어진 전쟁. 보통 가스코뉴 지방에서 벌어진 전면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근대 유럽의 프롤로그. 중세 유럽의 역사구분을 간단히 나누었을 때, ( 서로마 멸망 ) -프랑크 왕국-바이킹 지배-십자군 원정에서 이어지는 큰 변환점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리를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의 국경선과 민족성이 확고히 정립되기 시작하여,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자본의 이동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발전을 일으키는 대대적인 변혁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 전쟁이다. 같은 시기 동유럽에선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멸망하면서 큰 변화를 겪는다.
이름은 저렇지만 진짜로 양국이 116년 동안 계속 싸우지는 않았고, 단지 처음 선전포고를 한 1337년 이래 완전한 종전 선언이 발표되기까지 116년이나 걸렸을 뿐 중간에 몇 차례 휴전과 종전이 있었다.
비슷한 개념으로 17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엽까지, 9년 전쟁 ( 일명 팔츠계승전쟁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미국 독립전쟁-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이어진 양국 간의 충돌을 제2차 백년전쟁 ( 1701~1815 ) 루이 14세 시절부터 나폴레옹 1세가 프랑스에서 쫓겨날 때까지 114년의 기간을 자랑한다.으로 부르기도 하나, 잉-프 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전쟁들은 잘 통용되지 않는다.
'정면승부를 고집하는 프랑스 기사단 vs 온갖 얍삽한 방화 & 노략을 자행하는 잉글랜드 약탈군들'이 이 전쟁 초기의 이미지였다. 프랑스는 흑사병 이전을 기준으로 인구수 1600만 이상의 엄청난 강대국이었고 1328년 프랑스 왕실 재무부는 과세 대상 가구 조사에서 세금이 면제된 대귀족과 왕족들의 영지를 제외하고 2만 4천 개 교구의 247만 가구를 집계했다, 잉글랜드는 4~500만 명인 데다 이웃 왕국인 스코틀랜드한테도 털리고 자신들끼리 싸우느라 분열을 반복했으나, 이때의 실전 경험으로 쌓은 용병술을 통하여 프랑스 내부를 휘저으며 돌아다녔고, 프랑스의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들며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비교적 빠른 시기인 장 2세 치세부터 군제개혁을 시작해서 136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기동전술을 잉글랜드군보다 잘 구사했고, 대규모 야전군을 편성해서 한타를 걸어오는 잉글랜드군을 청야전술과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다. 1370년 퐁발랑 ( Pontvallain ) 전투에서는 크레시 전투 이후 24년간 지속된 잉글랜드군의 야전 무적 신화를 종결시켰다. 반세기 뒤 아쟁쿠르 전투에서 다시 폭망하는 바람에 돌격만 할 줄 아는 바보 이미지는 결국 떨쳐내지 못했지만.
이때의 잉글랜드-프랑스 대립이 근세기 유럽의 분쟁의 대부분으로 이어지는 것은, 잉글랜드-프랑스 통합 왕조라는 집단이 분리되는 것을 시작으로 유럽이 각자의 국경선과 민족 성향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분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결과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리, 두 라이벌의 외교 싸움에서 촉발되는 유럽의 각종 분쟁,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들이 양 국가를 지원하면서 얻은 엄청난 황금으로 일으키는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발전의 시대, 그리고 두 세력이 다투면서 약해지는 동안 독일이라는 신흥강자의 부상으로 이어진다. 다만 독일은 카를 황제가 독일 영내에 동군연합 스페인군을 끌어들이며 영주들의 분노를 유발, 사상 초유의 콩가루 국가를 이루는 자폭을 터뜨린다.
한마디로 십자군 전쟁 이후 근대 유럽이 보여주는 거의 모든 변화의 프롤로그를 장식하는 첫 번째 사건이라고 평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근대까지도 이 둘의 자존심 대결은 유럽 분쟁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이후로도 잉글랜드는 백년전쟁의 초반처럼 약탈대와 해적을 보내서 깐족거리며 유럽에 분란의 씨앗을 뿌리고, 대륙 국가인 프랑스도 비슷한 짓을 하지만 뭘 해도 명분을 찾아내서 대규모로 몰려다니는 모습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