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수원 삼성 블루윙즈 소속 축구선수. 포지션은 중앙 수비수 겸 좌측 풀백.
現 수원 삼성 블루윙즈 산하 U-18 유스팀인 매탄고등학교 축구부 코치.
광운대학교를 졸업하고 2003년에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입단한 김호의 아이들 1세대 멤버 중 하나. 수원 입단 이후 국내에서 계속 수원 삼성에서만 뛴 선수. 왼쪽 팔목에 블루윙즈 로고 문신을 새길 정도로 팀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다. 문신 위치로 왼쪽 팔목을 선택한 것은 왼손잡이라서 제일 잘 보이는 곳이기 때문.
2013년 마지막 경기에서 팀을 떠나는 곽희주를 위해 수원 팬들이 그의 등번호인 29번과 얼굴 가면을 이용한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는 모습. 이후 2년후에 수원에 다시 복귀했다.
선수 시절
김호 감독 시절부터 백업 수비수로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그의 포텐이 터지게 된 계기는 2004년 차범근 감독의 부임이었다. 사실 곽희주는 2003년 말, 잠시 축구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구단의 전지 훈련 중에 무단 이탈하게 된다. 왼쪽 눈 실명, 오른쪽 눈 시력 0.7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경기 중 불편함이 너무 심해서 축구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차범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곽희주 선수 특유의 파이팅을 보며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2004년부터 수원의 주전 수비수로 도약시키게 된다.
2004 시즌 초반, 수원 수비진의 초토화 ( 조-조 라인의 부상, 김영선의 부상 등 ) 로 인해 팀의 수비에 송송 구멍이 뚫리던 시기에는 수원 수비의 공적으로 인식되어서 수원 팬들로부터 먹을 욕 안 먹을 욕 다 먹었지만, 여름 시즌이 지나갈 때즈음부터는 단단한 벽이 되어서 2004 시즌 말에는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될 정도였다. 특히 2004년 여름에 있었던 FC 바르셀로나와의 평가전에서, 판타스틱 4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수비에 임해 무실점으로 막아내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플레이 스타일은 '파이터'로 끈적끈적한 대인 마크에 강했다. 신인 시절부터 한번 공격수가 보이면 계속 압박하고 달려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데얀이나 이동국처럼 K리그 전설급 스트라이커들에게 유독 강한 모습을 과시해 왔다. 중앙 수비수 치고는 발도 빠른 편. 다만 라인을 조절하거나 하는 부분에서는 다소 부족한 모습을 보여서 마토나 이싸빅, 조성환과 같이 수비 라인을 리드해줄 수 있는 수비수와 짝을 이루어야 좋은 활약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원래 대인 수비형 센터백 & 조율형 센터백 조합이 가장 시너지가 좋은 구성이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축구장에서의 모습과 달리 매우 조용하고 온화한 성격이며 낯을 심하게 가리는 편이라고 한다. 수원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하며 선후배들로부터 인망을 받고 있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어 2009년과 2012년에 팀의 주장을 맡아 활약하였다. 수원의 주장은 선수들의 투표로 선출되며 임기는 1년이다. 2009 시즌 당시 수원이 최악의 부진을 보이자 그에 부담감을 크게 느껴서 주장 완장을 다시 이운재에게 넘기기도 했다.
2011년 들어 중앙 수비수 경쟁자로 마토와 황재원이 들어와서 이 두 명에게 밀릴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윤성효 감독이 곽희주의 멀티 플레이 능력에 주목, 팀 내에서 중앙 수비수, 측면 수비수, 수비형 미드필더 등 수비 보직과 관련한 다양한 포지션을 맏길 것이라고 밝혔고, 실제로도 서울과의 경기 때 3백의 오른쪽 수비수로 서서 활약하기도 했으며 가끔 수비형 미드필더 정도 위치로 올라가서 1.5선에서 수비를 해 주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2013 시즌이 종료된 후 계약이 만료되어 FA 자격을 얻었지만 수원의 운영비 삭감 정책의 후폭풍을 맞아 결국 재계약에 실패했다. 팬들은 "'리얼 블루'마저 팀을 떠나게 한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는 분위기였는데, 사실 이 말은 명백한 오보이자 팬들의 오해이다.
곽희주는 팀이 2008년 이후 우승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민과 부담감 그리고 미안함이 너무 컸고, 구단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선수 시절의 마지막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 스스로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곽희주는 2013년 시즌이 종료된 후에도 구단의 자원봉사 활동에도 참여 하였고, 시즌 종료 후 치뤄진 그의 결혼식은 수원 삼성의 단장이 곽희주 본인의 부탁으로 직접 주례를 보았다. 이후 수원 구단에서 그를 버렸다는 기사가 나가자 다음날 직접 "그런 일은 절대 없다"라며 직접 반박하는 인터뷰가 실린 기사가 나오기까지 했다.
2014 시즌 자유 계약으로 FC 도쿄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컵대회 2경기만 출장하였고, 9월 4일 소속 구단과 계약을 해지하였다. 9월 16일 카타르 스타스 리그의 알 와크라와 계약을 맺었다.
2015년 3월 24일에 다시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돌아왔다. 플레잉 코치로 수원과 1년 계약을 체결하였다. 선수 은퇴 후에는 스카우터를 꿈꾸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평일 원정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 출전해서 복귀 헤딩골을 작렬시키며 4-3 승리에 일조했다.
2016 시즌에는 크고 작은 부상 및 징계 등으로 많이 뛰지는 못했고, 더군다나 서정원 감독이 포백과 쓰리백 사이에서 갈등하며 흔들리고 있던 수비진은 이정수와 곽희주로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기에 불안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FA컵 8강전 성남 FC전에서는 연장전까지 쥐가 나도록 뛰면서 수비하는 노장의 투혼을 선보이기도 했다.
리그 10경기 출장에 그쳤으나 그 중에서 FC 서울과의 경기에만 세 차례 출전했고, 그 때마다 크고 작은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일명 홀리 다이버 사건.
수원에서의 통산 300번째 경기이기도 했던 4월 30일 슈퍼매치에서는 후반 36분 골 찬스를 맞은 서울 아드리아노의 유니폼 상의를 잡고 늘어지다가 여의치 않자 발목을 손으로 잡는 비신사적인 반칙을 범했다. 규정대로라면 퇴장까지도 나올 수 있었지만 실제 판정은 경고에 그쳐 오심이 아니냐는 서울 팬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결국 연맹 상벌위 결과 퇴장성 반칙에 해당됨이 인정되어 출전정지 2경기 사후 징계를 받았다. 2달 후 유로 2016에서 헝가리 VS 포르투갈의 경기 중 헝가리의 졸탄 게라가 이 행동을 하면서 경고를 받았다.
6월 18일 상암에서 열린 슈퍼매치에서는 동점 헤딩골을 넣은 뒤 저 때의 반칙을 골 세레머니로 재현하며 여러 의미로 멘탈갑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에 이 내용이 가사로 들어가 있다.
후일 은퇴 후 []에서 해당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아드리아노에게 범했던 파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아내야 할 절박한 순간이었기에 일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이후 쏟아지는 비난과 파울 당시의 [나온 사진] 저 사진은 서울 팬들이 비난할 때도 거론했지만, 수원 팬들도 '홀리 다이버'라는 이름을 붙이고 현수막으로 만들어 응원하는데 쓰기도 했다.을 보며 창피함을 느꼈다고 한다. 골을 넣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와중에 저 때의 상황을 골 세레머니로 재현하자는 생각을 먼저 해왔고, 공교롭게도 진짜로 골을 넣게 되면서 저 김칫국 마시는 발상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으며, 이 골은 곽희주의 선수 생활 마지막 득점이 되었다.
8월 13일 슈퍼매치에서는 공중볼 경합에서 무리하게 발을 올려 윤일록의 얼굴을 발로 차는 비신사적 파울을 범한 뒤, 잘못 착지하면서 어깨 근육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 워낙 잔부상들을 안고 살던 몸이라 회복에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라 전망됐는데, 결국 남은 경기들을 뛰지 못하고 그대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비록 경기는 나오지 못했지만, 주장인 염기훈과 함께 부진한 성적으로 처져 있던 선수단 분위기를 추스르는데 힘썼다고 한다. 일종의 정신적 지주 역할.
국가대표
국가 대표와는 별 인연이 없는 편인데 2005년과 2008년에 국가 대표로 뽑힌 이후로 별로 선발되지 못했다. 통산 A매치 6경기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