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산시와 대구광역시에 있는 4년제 사립대학이다. 사실상의 본 캠퍼스라 할 수 있는 경산 캠퍼스는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 대동 ) 에 위치하며, 의과대학과 영남대학교 의료원, 일부 대학원이 소재한 대구 캠퍼스는 대구광역시 남구 현충로 170 ( 대명동 ) 에 위치한다. 학교의 상징은 천마이다.
역사
영남대학교의 전신은 야청 ( 也靑 ) 최해청 ( 崔海淸·1905~1977 ) 아버지는 조선 말기의 유학자였던 [최현달 ( 崔鉉達·1867~1942 ) 인데, 청렴결백한 인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군수 자리 하나 얻어 걸리면 삼대가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최현달은 이와 반대로 칠곡군수와 청도군수를 하면서도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얼마나 동네에서 베풀기로 유명했으면, 별명이 최칠곡, 최청도에다 대구판관으로 전임될 때, 마을 주민들이 감사의 의미로 선정비와 공덕비만 각각 4개를 세운 것도 모자라, 생사당 ( 生祠堂 ) 까지 세우려고 했다고.. 다만, 생사당은 세우지 못 하게 말렸다고 한다. 평생 노모를 모시고 살던 효자로도 유명했는데, 1905년에 서울에 노모가 있는 칠곡군수가 상경하자, 그와 자리를 맞바꾸고 11월에 칠곡군수로 발령을 받아 스스로 낙향 ( 칠곡군수로 발령됐다는 전보를 본가로 보내고 본가에서 아들이 태어났다는 전보를 받았는데, 이 아들이 최해청. ) 한 것도 모자라서, 1907년에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길 때 자결하려 했으나, 노모가 말려서 자결을 그만두었다고. 그리고 말년에는 영양실조로 고생하다가 생을 마감했다.]이 1950년 지금의 노보텔 자리에 세운 청구대학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 하는데, 전국 최초의 야간대학이기도 하다. 왜 야간대학으로 설립했냐면, 최해청 본인이 중학교 ( 당시 고등보통학교 ) 중퇴자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 차별하려고 만든 동화교육정책은 조선의 고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고, 대구고보도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모자라서 병마도 있었기에, 20살이던 해에 학업을 그만뒀다고 한다.과 한국의 명가로 유명한 경주의 만석꾼 경주 최씨 부잣집의 마지막 부자이자 독립운동가인 12대손 최준 ( 崔浚·1884~1970 ) 이 1947년에 설립한 대구대학 ( 현재 대구대학교와 다름 청구대와 대구대가 통합해서 영남대로 바뀌자, 기존 한사대가 버려진 대구대 이름을 가져다 썼다. ) 이다. 참고로 최해청과 최준 둘 다 경주 최씨 집안이다. 다만, 최해청은 최준과는 달리,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경주 최씨 집안 아니랄까 봐 아버지인 최현달의 뜻을 이어받아서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두 대학을 박정희 정권 시절 통합하여 만들어진 대학이 영남대이다. 이때 영남대의 법인인 학교법인영남학원 정관 1장 1조에 "이 법인은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하여 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써놓았다. 박정희 사후에도 이 조항이 변경되지 않다가 현재는 결국 설립자 박정희로 변경되었다.
청구대학은 1948년 9월 최해청에 의해서 대구문리과전문학원 야간부로 종로에서 개교했으며 1950년 3월 포정동으로 이전하고 4월 25일 재단법인 청구대학 설립, 청구대학으로 개편했다. 1955년 문화동 현 노보텔 자리로 이전하고 1963년 병설 공업고등전문학교 설립했는데 이것이 경일대학교의 전신이다. 1964년 효목동으로 본부 이전했으나, 대학정비사업으로 한차례 흔들린 끝에, 붕괴사고가 일어나고 교직원 비리가 발견되자 이사회가 1967년은 청구대학이 학내외의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 때문에 자력으로 존립하기 힘든 상황에 처한 시기였다. 이때 청구대학 교수로 있던 노산 이은상 선생이 그해 5월, 5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6대 대통령에 연임된 박대통령에게 “각하. 임기를 마치고 나면 마당 쓸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진언했고,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영남대 탄생의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전해진다. []
대구대학. 조선시대 무관 최진립 장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활약한 장군. 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공을 세웠고 이후 정식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가 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히자 주변의 만류에도 왕을 구하기 위해 북진하여 청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인조 당시에 인조가 죽음을 애석해 하며 제문을 지어주었고, 숙종 때에 사액 서우가 내려졌는데 당시까지 무반의 사당에 왕이 현판을 내린 사례는 충무공 이순신과 김시민의 사례 밖에 없었다. 국가의 양난에 무공과 충정을 보였으나 현재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위인. 의 후손인 최준 선생은 12대에 걸쳐 내려온 어마어마한 부 최진립의 손자인 최국선 ( 1631~1682 ) 이후로 이 집안은 지역민•소작농에게 공정하고 베푸는 경영을 하고, 모든 식객에게 공평한 대접을 하는 등 명망이 높아 경주 최부자라는 명성과 함께 20세기까지도 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를 쌓은 부농이었으며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독립자금을 제공, 안희제의 백산상회를 통해 임시정부에도 독립자금을 제공했으며, 무장투쟁계의 총무도 맡는 등 부를 민족과 나라를 위해 쓴 독립운동가였는데, 해방 후 새 나라를 위해서는 인재의 교육이 절실함을 알고 자신도 대구대학을 만들고 직접 운영했다.
대구대학은 1945년 10월 대구대학 전신 경북종합대학 기성회 조직했고 1947년 3월 경북종합대학이 가칭 대구문리과대학으로 개교하고 1947년 9월 재단법인 대구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48년 9월 교사를 대봉동 현 대구중학교 자리로 이전했으며 1951년 4월 교사를 포정동 청구대학 구내로 이전, 향교재단과 합류하여 공동 운영했다. 1952년 5월 교사를 남산동 향교 구내로 이전했으나, 1954년 12월 대명동 신축 교사 현재 영남대학교병원, 영남대 의과대학, 영남이공대학교가 있는 자리이다.로 이전했고 1957년 6월 본관이 준공되었다.
하지만 대구대학은 1960년대에 재정난에 빠지게된다. 사재를 거의 다 투자하여 대구대학을 운영했는데 당시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측은 대대적인 대학정비사업을 추진한다. 이 때 대구대학교의 설립자 최준은 당시 학생을 그만 받든지 당시엔 등록금도 교수월급도 다 설립자가 냈었다. 과를 줄이든지, 소유 대학인 대구대학에 더 많은 투자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이에 결국 최준은 고려대학교를 이용익 선생이 손병희에게 넘기듯 대구대학을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에게 학교를 잘 운영하라는 일념하에 아무런 대가없이 학교 경영권을 넘겨주었다. 이렇게 학교의 경영권은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에게로 넘어간다.
전말은 과거 대구대학 교수를 지냈던 신현확 3.15 부정선거 관련으로 구속된 적도 있으나 제9, 10대 국회의원에 부흥부 차관, 부흥부 장관, 보건사회부 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국무총리,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 역임.이 시멘트 사업을 확장하면서 홍보 목적으로 고심하던 이병철 회장에게 대구대학의 인수를 제안하고 이병철 회장은 경주로 내려가 인수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 때문에 이병철 삼성 회장이 퇴진하고 2년 뒤 현장 복귀하는 조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양도되었다. 정확히는 대구대를 넘기고 성균관대학교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대구대학의 경영권을 이병철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넘기게 된다. 즉, 대구대학 재단의 소유권은 경주 최씨 일가 → 삼성그룹 이병철 前 회장 → 박정희 前 대통령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청구대학, 대구대학 이 두 대학이 통합하여 1967년 12월, 현재의 영남대가 출범하게 된다.
영남대학교의 탄생
이사장 이동녕 ( 제4,6,7대 국회의원 )
이사 이효상 ( 제6,7대 국회의장 )
이사 김성곤 (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 쌍용그룹 회장 )
이사 신현확 ( 국무총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
이사 백남억 ( 민주공화당 의장, 제5,6,7,8,9,대 국회의원 )
이사 이후락 ( 중앙정보부장, 대통령비서실장 )
이사 신기석 ( 영남대학교 초대총장, 부산대학교 총장, 국회의원 )
이사 서정귀 ( 국회의원, 재무부 차관 )
이사 성상영 ( 대성모방 회장 )
이사 여상원 ( 대구상공회의소 회장, 대구은행 초대회장 )
감사 오일룡 (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
위 이사진 구성으로 통합 영남대학교가 출범하였다. 1970년대, 영남대는 이선근 박사 ( 신간회 출신으로 문교부 장관, 영남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동국대학교 총장 역임. 문교부 장관 시절 현재 국사편찬위원회를 설립한 장본인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 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총장 재임 시절 ( 1969년 4월~1974년 2월 ) 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국사 가정교사였던 그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나타냈다. 이선근 총장의 승용차에는 ‘경북 1호’의 번호판이 부여되었고, 당시 경북도지사 번호판이 경북 가 1001호였고, 영남대 총장 번호판은 경북 나 1001호였다. 여담이지만 경북대학교 총장은 번호판이 대구1 가 1111호였다고 한다. 경북 각급 기관장들은 대통령과 직접 전화 통화를 하던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을 정도이다. 학교가 뻗어나가는 데 거칠 것이 없었다. ‘한강 이남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라는 자부심이 이 시기에 용솟음쳤다. 신생대학에 불과했던 영남대학교가 아웃풋 좋은 대학으로 평가받는 명성은 대부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저 막연한 주장은 아닌 것이, 70~80년대 졸업생들은 대구, 경북 일대에서 막강한 파워를 행사함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도 지방사립대학으론 유례없는 전성기를 누렸다. 그래서 현재도 대기업이나 고위 공직자 중에서 영남대학교 출신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내력 덕분에 현재에도 대경권에선 아직 인식과 평판이 좋은 편이다.
그러나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학교 또한 혼란에 빠졌고, 이후 박근혜 前 대통령이 이사장 무려 20대에 이사장이라는 파격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교주 ( 校主, 학교주인 ) 이라는 정관과 박정희 정부 하에서 직간접적으로 일한 사람들이 주요 이사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후 토지 이면계약 등으로 국정조사를 받은 최초의 사립학교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례없는 민주화보도 대행진과 같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대학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총학생회가 임수경 방북 사건 등으로 논란이 되어오던 운동권 단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탈퇴하면서 기존 학내 운동권 세력과 총학생회와의 다툼이 있었다. 이후 2009년 박근혜 대통령의 추천이사 4명을 포함한 7인 이사회로 개편되면서 정상화되었다. ['영남대 설립에 얽힌 이야기'] ['영남대 설립 이면사']
2016년 말에는 제14대 노석균 총장이 임기 만료 100여 일을 앞두고 사퇴를 했다. [기사] 총장 관사 사용, 약학대학 신관 건축 등과 관련하여 교직원에게 내려지는 징계를 막지 못한 것과 내부 소통 문제가 주된 이유였지만, 2013년 노석균 총장 취임 이후로 이어져 온 재단과 본부 간 갈등으로 인한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캠퍼스 이전
대구 시내 대명동 캠퍼스 ( 현재 대구캠퍼스 ) 의 부지가 좁아 1970년대부터 단과대학과 각종 학내 시설 등을 점차적으로 대구의 동쪽에 위치한 경산시로 옮기면서 넓기로 유명한 현재의 영남대 경산캠퍼스의 역사가 시작된다. 실제 단일면적으로 서울대학교 다음으로 전국 2위다. 본관 뒤편으로 펼쳐진 토지를 한국조폐공사에게 팔기 전까지는 흔히 말하는 100만 평 부지였는데 지금은 대략 82만 평으로 부지의 대부분은 거의가 평지다. 자전거를 타고 모든 곳을 갈 수가 있으며 교내 순환버스도 운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