燕興夫.
아이고 성님 동상을 나가라고하니 어느곳으로 가오리요
육각수, [기가 막혀] 중
흥부전의 주인공으로 부친 사후 형 놀부에게 전재산을 모두 털리고 쫓겨나서 길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살다가 구렁이에게 공격받는 제비를 구해주고 다리를 치료한 보답으로 그 제비가 물고 온 박씨를 키워 그 박을 갈라보았더니 보물이 나와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자식들의 숫자가 상당히 오락가락한다. 적게는 3명에서 많게는 25명까지 설화마다 숫자가 다르다. 흥부전이 본래 구전되어오던 거라 오락가락하는 것인 듯. 어떤 판본에서는 이 많은 수의 자녀들이 전부 친자식은 아니고, 흥부의 마음이 어질어 떠돌아다니는 고아들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보는 대로 거둬들였다는 설정도 있다.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판본에서는 흥부 아내가 마지막 박은 어쩐지 느낌이 안좋다고 타지 말자고 했지만 결국 타게되고 거기서 첩이 나오자 아내 하는 말이 '아이고, 그래서 내가 저 박은 타지 말자고 했는데' 그러자 입이 쭉 째진 흥부가 하는 말이 가관으로 "여보 걱정마오, 설마하니 조강지처 박대할까?" 일부 판본에서는 박에서 나오는 여인이 양귀비로 소개되기도 한다. 박 속에서 사람의 기척이 들리니, 흥부가 "뉘시오?" 물으니, "'비'옵니다." "'비'가 누구요?" 다시 물으니, "양귀비옵니다."하면서 절세미인인 양귀비가 나왔고, 놀부의 박에서는 '비'는 비인데, 성이 장씨였다.
몰락한 양반이나 조선 후기 발생하는 초기적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예전보다 가난해진 소작농의 자화상과 꿈이 만들어낸 캐릭터라는 설이 있다.
소설상에서 흥부가 박을 탔을 때 나오는 물건 중 하나가 흥부 자식들이 공부할 책이었다. 물론 시대상으로는 그 때 가장 대표적인 꿈은 벼슬하는 거였다. 조선시대에 공부해서 출세를 할 수 있었던 일의 99.9%가 과거시험 혹은 하급 관리에서 시작하는 것들이라서 그 당시에 공부를 하는 것은 모두 벼슬을 하는 것이 목적이다.
애당초 지금처럼 직업이 세분화가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사농공상에 의해서 직업이 천대를 받았기 때문. 양반의 경우에는 3대에 걸쳐 과거에 한 명도 급제하지 못하면 양반의 신분이 박탈됐다. 출세 뿐만 아니라 양반의 작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과거는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였던 것.
흥부가의 버전 중엔 놀부가 흥부를 쫒아낸 땅으로 온갖 작물들을 키우는데 그게 고추, 담배, 인삼 등이었다는 것도 있다. 당시 이런 상품 작물을 키우기 위해 그동안 밭 갈던 빈농들의 땅을 빼앗거나 소작하는 자를 쫓아내는 경우도 많아서 흥부는 그런 상업 발달의 과정에서 소외된 자들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전북 남원시 아영면과 동면이 서로 흥부의 고향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아영면은 정조때 만들어진 절충장군임세강지묘라는 비석의 내용을 근거로, 동면은 판소리 흥보가에서 제비가 박씨를 물고 흥부네 집 찾아오는 대목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최근에 밝혀진 최고 오래된 버전인 1833년 필사본인 흥보만보록의 내용에 의하면 진짜 배경은 조선시대도 아닌 고려시대 인물로 추정되며 평안도 평원군 순안면 일대에서 장천의 두 아들이 있는데 장남의 이름은 우리가 익히 아는 놀부이고 차남인 흥부가 훗날 덕수 장씨의 시조라고 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참고로 이 덕수 장씨라는 가문은 고려 충렬왕 때 위구르족 출신으로서 제국대장공주를 호위하러 고려에 온 셍게 ( 三哥 ) 라는 사람이 시조인데 고려에 온 이후 장순룡 ( 張舜龍 ) 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해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흥보만보록 내용대로라면 흥부와 놀부 형제는 모두 위구르족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놀부와 흥부는 평양지역의 부잣집의 데릴사위로 갔었으나 흥부는 부모님 공양을 위해서 집에 금방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계속 그대로 데릴사위로 있던 놀부는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은 탓에 재산을 동생에게 나눠줄 수 없어서 흥부가 가난하게 지낸것이라고 한다. 이후 내용은 비슷하게 흘러가다가 흥부가 훗날 무과에 급제했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작중 흥부의 성씨는 제비 연 ( 燕 ) 씨 ( 소설 ) 혹은 성 박 ( 朴 식물 박을 뜻하기도 한다. ) 씨 ( 흥보가 ) 로 설정되어 있다. 작품에서 제비와 박이 지니는 위상을 생각해볼 때 매우 알맞은 성씨다. 다만 1833년에 작성된 흥보만보록의 필사본에는 덕수 장 ( 張 ) 씨로 설정되어 있어 진짜 성씨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