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타겟형 스트라이커 최전방에서 몸 싸움과 헤딩 경합을 해줄 수 있고 수비수를 끌고 다닐 수 있는 정통 스트라이커의 범위에서는 최고이다. 하지만 공격수라는 롤 자체에선 차범근에게 밀린다. 차범근의 경우 완전한 타켓형 스타일은 아니였고, 손흥민도 몸 싸움에 강한 타켓형 스트라이커가 아닌 2선 침투력이 좋은 공격수이다. 황선홍 은퇴 이후 대표팀에서의 타켓형 스트라이커로는 이동국, 조재진, 박주영, 이정협, 김신욱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경기력을 보면 황선홍이 왜 최고인지 알 수 있다. 일단 황선홍은 14년 동안 부상이 없을 때는 항상 감독이 그 누구더라도 국가대표 최전방 공격수로 쓰였다. 참고로 동시대 정통 스트라이커인 최용수와 김도훈은 황선홍이 부상으로 못뛰거나 투톱으로 쓰일 때만 대표팀 주전으로 활약했고 황선홍이 회복되었을 때는 둘 모두 주전 경쟁에서 밀렸다. 즉, 황선홍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었던 유일한 경쟁자는 자신의 부상 뿐이었다.. 국가대표 ( A매치 ) 103경기 50골로 A매치 득점 2위 1위는 차범근이며 센추리 클럽 가입자 참고로 14명의 센츄리 클럽 가입자 중 공격수는 차범근, 황선홍, 이동국 3명 뿐인데 공격수의 경우 오랜 기간 기량을 유지하는게 더 힘들다는 뜻이다.. 한국 축구선수 유일의 해외리그 득점왕 세레소 오사카 이적 이듬해인 1999년에 26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90년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부동의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하며, 홍명보와 함께 H-H 라인 친구 사이이기도 한 둘은 무려 4번의 월드컵 본선에 함께 출전했다. 이후 2000년대 대표팀 듀오로는 이영표-박지성이 있다.으로 불리며 90년대 한국 축구를 이끈 상징적인 선수였다. 1988년부터 2002년까지, 21세부터 35세 때까지 14년간 부상이 아닌 한 항상 대표팀의 최전방 공격수로 뛰었다. 공격수로서 은퇴할 나이인 35살의 나이에도 2002 월드컵에서 주전 공격수로서 한국팀의 4강을 이끌었다. 간혹 2002년 월드컵을 직접 보지 않은 세대 중 안정환이 주전 공격수였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황선홍이 주전 공격수이고 안정환은 황선홍과 교체되는 후반 조커 공격수였다. 그러나 황선홍이 본선 첫 경기인 폴란드전부터 허벅지 부상을 입었고 이후 경기부터 진통제 주사를 맞아가며 뛰는 바람에 세 번째 경기인 포르투갈전부터는 안정환이 선발 출장했다. 조별 예선부터 4강까지의 6경기 중 황선홍이 3경기 ( 폴란드, 미국, 독일 ) , 안정환이 3경기 (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 에서 선발 출장했다. 보통은 선수가 나이를 먹어가며 기량 저하로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뛰지 못하거나 미리 은퇴하는 경우가 많다. 동시대의 공격수인 최용수, 김도훈, 서정원이나 2002 한일 월드컵 공격수였던 이천수, 설기현 등 모두 30세가 넘어가면서부터는 기량 저하로 대표팀 주전에서 밀렸다. 안정환의 경우도 35세로 출전한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 경기도 못뛰고 벤치에 있었으며 박지성은 35세가 되기 전에 은퇴했다. 황선홍 이후 공격수인 이동국, 박주영 등 대표팀을 거쳐간 수많은 선수들도 기량 기복이나 감독의 전술에 의해 또는 나이가 들면서 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즉, 14년간 대표팀 주전이라는 것 자체가 레전드를 뜻하며 30대 중반까지 주전으로 활약했던 선수는 차범근, 홍명보, 황선홍 딱 3명 뿐이다. 다만 90년대 축구를 직접 보지 않은 세대들은 그저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고, 그마저도 왜곡되어 폄하되는 경우도 있다. 지독한 부상 전방 십자인대 두 번 파열. 그로 인해 군 면제이다.과 불운에 시달리며 1994 미국 월드컵 볼리비아전 한 경기로 스포츠 역사상 한국에서 가장 많은 욕을 얻어먹은 비운의 스트라이커이기도 하다. 또 국가대표 선수 시절 한일전의 일본 킬러로 유명했는데 그가 뛴 한일전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고 5골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유튜브 세대 중에는 1998년 한일전의 역전골인 슬라이딩하는 골 셀러브레이션으로 기억하는 경우도 많다.
클럽팀은 K리그 포항 스틸러스 ( 1993~1997 ) , J리그 세레소 오사카 ( 1998~1999 ) , 가시와 레이솔 ( 2000~2002 ) 등에서 활약했다.
은퇴 후 해설자를 거쳐 2008년 부산 아이파크에서 감독으로 데뷔했고, 이후 친정 팀인 포항 스틸러스 ( 2011년 ~ 2015년 ) , FC 서울 ( 2016년 6월 ~ 2018년 4월 30일 ) , 옌볜 푸더 ( 2018년 ~2019년 ) , 대전 하나 시티즌 ( 2020년 ) 의 감독직을 역임했다.
감독으로서 커리어 전반기에는 좋은 경력을 이어갔는데, K리그에 40대 감독 열풍을 불러온 1960년대 후반~70년대 중반 태생 감독들 중에선 최용수 감독과 함께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었다. 그러나 FC 서울 감독 부임 이후 첫 시즌 K리그 우승을 제외하면 2017 시즌에는 리그 5위에 그쳐 5년 만에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실패하더니, 2018 시즌에는 급기야 10위, 11위를 왔다갔다하며 강등권 문턱에서 전전하다가 4월 30일자로 결국 사임하면서 감독 명성에 금이 가고 말았다. 그러다 12월 14일 뜬금없이 중국 갑급 리그의 옌볜 푸더의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나 구단 해체, 이후 휴식을 취하다가 2020년 하나은행에 인수된 대전 하나 시티즌의 초대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진한 경기력이 지속되어 9월 8일부로 사퇴하였다. FC 서울과 대전 하나 시티즌 두 구단에서 연거푸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지도자 생활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별명은 황새 성이 황씨라서 황새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를 살펴보면 가난하던 어린 시절 약점이었던 체격을 만회하기 위해 물배를 채워 뒤뚱거리는 모습을 보고 동료들이 황새라고 별명을 붙였다는 슬픈 사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