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한 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댈 위해 노래부르리.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中
김창완 ( 보컬, 기타 ) , 김창훈 ( 보컬, 베이스 ) , 김창익 ( 드럼 ) 형제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록밴드. 대한민국 대중 음악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전설적인 락밴드로 평가받는다.1977년 로 데뷔했다. 서울대학교 2명 ( 김창완, 김창훈 ) 둘은 서울 중앙고, 용산고를 각각 졸업했다.에 고려대학교 1명 ( 김창익 ) 성남고 졸업의 가족밴드다.
산울림 삼형제는 어릴 적에 주말마다 방에 계란판을 붙여서 방음실로 만들고 싸구려 기타로 자기들이 만든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이때 만든 곡이 1~3집에 있는 곡들로 그 덕에 1집이 나온 후 1년만에 2, 3집이 연달아서 나올 수 있었다. 또 이 때 카피하지 않고 자신들의 음악을 했기에 더 독특한 음악이 나올 수 있었기도 하다. 이후 1977년에 MBC 대학가요제가 처음으로 개최된다고 하여 삼형제가 무이 ( 無異, 평소와 다름없음 ) 어릴 적의 김창완은 매우 염세적인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밴드명에서도 그 느낌이 뿜어져 나온다.라는 밴드로 대학가요제에 참가한다. 당시 김창훈은 샌드페블즈 5기 멤버로 있었는데 샌드페블즈를 탈퇴하고 무이로 들어오면서 자작곡 "나 어떡해 ( 이 곡은 산울림 2집에 리메이크되어 다시 실린다 ) " 를 샌드페블즈에게 주고 나온다. 대학가요제 예선에서 무이는 "문 좀 열어줘 ( 산울림 1집 수록곡 ) " 로 1위, 샌드페블즈는 "나 어떡해"로 2위를 기록했는데 김창완이 1975년 졸업생이라 재학생만 참가할 수 있는 규정에 걸려서 무이는 결국 탈락하고 제 1회 MBC 대학가요제의 대상은 샌드페블즈가 탔다. 이후에 "나 어떡해"가 김창훈이 쓴 곡임을 알고 음반을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왔는데 삼형제는 프로페셔널한 음악을 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이제 사회 생활을 할 나이가 되었기에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을 마지막으로 기념하는 의미에서 음반 제안에 응했고 이렇게 해서 산울림 1집이 나왔다. 이때 레코드 판이 40만 장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기준에서는 상당한 대박이었다고 한다. 이후 2007년에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5위에 뽑혔다. 참고로 6위가 산울림 2집이다. 저 리스트 만으로도 산울림의 위치를 알만한데, 10위권에 2개의 앨범을 집어넣은 것은 산울림 뿐이다. 한 밴드의 이름으로 100위권에 3개의 앨범을 집어넣은 것은 딱 2 뿐 ( 개인을 포함하면 김광석과 정태춘이 포함된다. ) 인데 하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이고, 다른 하나가 산울림이다 ( 3집 73위 ) . 단 2018년 제3차 선정에서는 3집이 빠져서 2개의 음반이 10위권을 유지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초기 ( 1~3집 ) 에는 펑크 록 느낌의 디스토션이 강한 공격적인 사운드를 많이 보여줬는데 이 스타일은 영미 록의 프로그레시브나 사이키델릭 성향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어떠한 선대 록 음악의 성향도 받아들이지 않은 산울림만의 독창적인 작법이었다. 실제로 삼형제는 데뷔 전 대학 그룹 사운드가 흔히 하던 카피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에 처음 밴드를 시작할 때부터 작곡에 몰두 데뷔 시점에 이미 상당한 분량의 창작곡이 있었다. 이때문에 데뷔 직후 1, 2, 3집을 거의 연달아 발표할 수 있었다. 산울림의 초반이 그야말로 전설로 남게 된 것은 미숙한 실력과 부족한 장비를 가지고도 도달하였던 파격에 가까운 독창성 때문이다. 들국화의 드러머였던 '주찬권'은 인터뷰에서 산울림에 대해 "창작력은 와방 ( 최고 ) 인데 연주가... 좀..." 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런 산울림에 자극받아서 창작과 연주과 완벽히 조화된 들국화가 등장했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외국 음악 카피만 하면서 자체 창작은 도외시하고 연주력에만 목 매달던 일부 음악인들에게 산울림의 등장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직접적으로는 3집까지는 한국식 개러지 록의 탄생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이들의 초기작은 "대한민국 헤비메탈의 시작" 이라고도 평가된다. 3집의 [마음' 이라는 곡이 이런 인식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 같다.] 어떤 음악에도 영향받지 않았으나 한국 거의 모든 록커들에게 영향을 줬다. 지저분한 퍼즈톤 위에 깔리는 김창완의 나레이션에 가까운 나지막한 노래와 관조적인 가사는 그 당시의 대중들에게 상당히 충격이었다고 한다. 실험적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뛰어넘어서 사랑받는 강한 음악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중기와 후기를 거쳐가면서 산울림은 포크락과 디스코 등 딱 하나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하였고 계속적으로 많은 한국 록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때의 발라드 노래들은 초기의 록적인 감성을 후퇴했지만 대중들의 많은 인기를 끌었다. 아이유가 훗날 리메이크했던 가 바로 이 시기의 곡이다.
그러면서도 정규 앨범 사이사이에 나 와 같은 동요 앨범을 내기도 한다. 산울림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로 비관적이고 시니컬한 노래와 어린이를 위한 동요를 동시에 작곡할 수 있는 다양한 감성을 소화할 수 있는 밴드라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1월 29일 드럼을 담당하고 있는 막내 김창익이 캐나다 직장에서 눈길에 지게차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지게차에 깔려 사망하는 불의의 사고가 있었다. 김창완 밴드의 EP 앨범 에 수록된 'forklift'가 이에 대한 노래다. 이로 인해 김창완은 "산울림은 가족 밴드다. 막내가 이렇게 떠나 버린 이상 예정되어 있던 것 이상의 산울림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건 없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로써 산울림은 해체하고 긴 전설의 막을 내린다.
여담이지만 활동 당시 유난히 심의 태클을 많이 받은 밴드 중에 하나다. 당시는 악보 검열, 가사 검열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산울림 음악을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아니 이게 왜 심의야" 하고 놀라겠지만 이게 다 그 심의 필터에 걸러져서 나온 물건이라고 한다. 참고로 심의 사유는 퇴폐 내지는 가사가 너무 슬프다 등등 대표적으로 1집은 모든 곡이 싸그리 심의에 걸렸고 "아니 벌써"의 경우 가사를 전체적으로 갈아 엎었다고 한다. 고친 가사도 '자살을 하려고 했는데 벌써 날이 밝았네'라는 뉘앙스라고 한다. 김창완 본인의 말로는 개작 전 가사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굉장히 비관적이고 우울한 가사였다고 한다. 이외에 3집의 "내 마음"도 원래 "황무지"라는 제목이었다가 바뀌었다. 이후에 김창완이 그 울분 ( ? ) 을 뒤에 풀어낸 노래를 김창완밴드의 산울림 리마인드 앨범에 묶어 발매했는데, 제목도 '금지곡'이고 노래 내용도 '인생 그거 쉬워요. 동물 학대하지 말고 자연을 지켜요.' 이런 내용이다.